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공포로 석방 사건 (문단 편집) === 반공포로 === || [[파일:Anti Commune war prisoner 2.png|width=100%]] || || 1953년 6월 18일, 마지막으로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사진을 들고 나오고 있는 모습. || 이 사건이 당시 국제사회에서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풀려난 반공포로들은 당연히 이승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에 가기 싫은데 강제로 북한에 보내질 상황에 처했다가 이승만이 밀어붙인 이 사건으로 구사일생한 셈이기 때문. [[논산시]] [[관촉사]] 입구에는 1965년에 세워진 [[이승만]]의 추모비가 있다. 당시 논산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이때 풀려난 이들 중 일부가 이승만이 사망하자 이곳에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다만 반공포로에 대한 전후 처우가 나중에 문제가 됐는데 이들에게 충성심을 보장받겠다며 한국군 입대를 요구한 것은 그렇다 쳐도 이후에도 위험 인물로 간주하여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한국에서 반발을 샀다.[* 1960년대 파독광부 선발 과정에서 반공포로 출신이라는 이유로 출국거부당한 사례가 나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때 빡친 반공포로 출신들은 수용소에서 새긴 반공 표어나 그림 문신, 심지어 '''칼로 그어 새긴 문신이나 그림(!!!)'''을 보여주며 [[반공 노래]]를 부르며 항의하거나 면접실을 뒤집는 깽판을 치거나 단체로 몰려가서 진을 치고 하루종일 에워싸고 위협하다가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이때 반공포로들은 정말 한탄을 금치 못했다고도 하며 일부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나와서 동네 순경은 건들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송환된 한국군 포로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용호도]](당시 이름은 용초도)에서 가혹한 사상 검증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억울함에 [[자살]]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혐의를 벗은 귀환 포로들도 군에 복귀했으나 대부분 한직을 전전하는 등 불이익을 받아 2000년대 초에 사회 문제로 방송에서 다루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